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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닳은 붓이 아름답다 / 김선두 중앙대학교 미술학부 교수
이름 관리자 이메일  bbanlee@kfcc.or.kr
작성일 2018-12-03 조회수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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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마치고 씻어 말린 채색붓들을 가만히 쳐다보니 염색한 아이돌들의 화려한 헤어스타일처럼 형형색색 예쁘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아이돌의 머리 색이 인공적이라면 채색 붓의 색들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호분과 분채을 칠하면서 털에 색들이 베어들었기 때문이다. 닳은 붓의 털은 거칠고 듬성듬성하다. 가난한 화가에게 시집을 와 힘든 시집살이와 네 명의 자녀를 키우느라 많은 고생을 하신 어머님의 듬성듬성한 하얀 머리숱이 생각나 뭉클하다. 닳은 붓에 스민 색들이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숭고한 아름다움까지 느껴진다. 털이 빠져 듬성한 붓에 베인 색들이 깊다. 오랜 시간 남을 위해 헌신해 온 사람의 인고의 시간 그리고 사랑의 빛깔이 있다면 저런 색일 것이다.

 

동양화의 채색붓을 오래 쓰다보면, 붓 모양이 처음엔 통통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털이 마모되어 가늘게 변한다. 토굴에서 오랜 수행을 끝낸 스님처럼 수척하다. 몇 해 전부터 채색붓을 다 쓰고 나면 버리다가 다시 선붓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런 붓으로 선을 그으면 노래 잘 하는 블루스 가수의 허스키한 목소리처럼 자연스런 파필의 거친 맛이 난다. 새붓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있다. 처음부터 선붓이 아닌 채색붓이었다가 많은 붓질에 의해 마모되어 나온 선들이라 느낌이 깊고 자연스러운 울림이 스며있다.

 

화가는 그림에서 한 소식을 얻기 위해 수많은 붓질을 한다. 오래 긋다보면 붓질의 무게가 선에 담겨진다. 필묵에 화가의 피와 땀이 담겨 깊어지고 묵직해진다. 그 경지는 가본 자만이 안다. 동양의 옛 화가들이 그림에서 자신의 세계를 얻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상징하는 두 가지는 퇴필성총과 철연이다. 버린 붓이 무덤을 이루고, 먹을 갈아 쇠로 만든 벼루에 구멍이 나도록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루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두 낱말엔 중국적인 과장이 묻어 있지만 그 만큼 최고가 되기 위해선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은 감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자신이 살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을 감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요즘 들어 새롭게 느끼는 것이지만 붓질의 감각으로 세상을 보면 그 속살이 보일 때가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정점에 다다랐을 때 그 감각은 그 분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수평이동한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터득한 감각으로 세상을 보면 전에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음식점에 가서 음식 맛을 감별하거나, 백화점에서 옷을 사거나, 가요계에서 누가 이 시대 최고의 가객인가 서열을 매기거나, 심지어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때도 필묵의 감각에 넣었다 빼내면 답이 나온다. 붓질의 감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 일이관지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림 길을 걸어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삶의 본질을 파악하는 날카로운 시력은 필수라 치고, 이를 구현할 기량에서 가장 이루기 힘든 것이 선을 긋고, 형태를 잘 그리는 것이다. 한국화의 기초를 공부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선과 형태를 따로 생각한다. 나중에 깨달은 거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화 안에서 선과 형태는 하나다. 선과 형태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형태를 먼저 그려놓고 붓이 형태를 따라가야 선과 형태 둘 다 자연스럽다.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은 운전 솜씨도 좋아야 하지만 그 지역의 지리를 우선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화가의 선이 자연스럽고 유창하려면 판소리에서 고수가 창자의 길을 여는 것처럼 형태가 길 안내를 잘 해야 한다.

수묵화는 피겨스케이팅과 같다. 피겨 스케이팅은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 음악이 흐르고 거기에 맞춰 넘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은 기술과 큰 기술을 구사한다. 수묵화도 먼저 종이 위에 마음속으로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그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는 도중에 붓은 세웠다 뉘었다, 모았다 깼다, 빨랐다 느렸다, 길다 짧다, 굵다 가늘다를 구사하면서 리듬을 타고 그림을 완성한다. 앞에 열거한 것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주의하며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져야 한다. 피겨스케이팅에서 엉덩방아를 찍으면 안 되는 것처럼 그림에서도 한 번이라도 붓질을 잘못하면 그림을 망친다. 수묵화에서 작품의 완성도는 화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밖에 있다. 많은 파지가 이를 증명한다. 한국화는 공간의 예술이자 시간의 예술이라고 한다.

 

높은 감각의 세계에 닿기 위해 제자들에게 긴 호흡의 공부를 요구할 때가 있다. 공부에는 중간고사나 기말 시험 같은 단 기간에 해야 할 공부가 있고 긴 호흡으로 해야 할 공부가 있다. 예술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 지녀야 할 공부는 모두 긴 호흡의 공부다. 학교 수업 시간에 이런 긴 호흡의 공부는 가르쳐주지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많은 시간 이를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경험 상 한국화에서 추천하고 싶은 필수적인 긴 호흡의 공부는 만 권의 책읽기와 만 장의 크로키 그리고 만 장의 수묵화그리기이다.

 

우리 고향 마을 뒤에 큰 산이 있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도시락을 싸 들고 친구들과 가끔 올랐다. 산을 오를라치면 시시각각 풍경이 달라진다. 계곡에서 봤던 풍경과 능선을 타기 시작했을 때 풍경이 다르고 마침내 산의 정상에 서면 풍경은 급속히 확장된다. 정상에 다다르기 전 3부나 5부나 8부 능선쯤 오르다 힘들어 하산한 이들은 정상의 확장된 풍경을 알 수가 없다. 각자 자기가 올랐던 높이의 풍경을 그 산의 모든 풍경이라 생각한다.

한국화의 붓질이나 형태도 그렇다. 높이 터득한 자 만이 보이는 경지가 있다. 모든 작가들이 모두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루하고 힘든 사막 같은 험로를 온몸으로 뚫고 나가는 작가들을 빼곤 말이다. 닳은 붓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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