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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통의 기술 / 김세현 한국건설경영협회 상근부회장
이름 관리자 이메일  bbanlee@kfcc.or.kr
작성일 2015-03-03 조회수 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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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사회는 불과 며칠 사이에 벌어졌던 총기난사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총기사고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고 자부해 온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그만큼 사회가 각박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면서 정서적으로 매마르고 소통에 미숙한 이들이 많아지는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극단적 사건들의 이면에는 항상 소통의 부재가 있다. 특히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간 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이번 참극을 보면서 우리사회에 아직도 건전한 소통의 문화라는 것이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한때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소통의 문화에 대해서는 참 할 말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소통 부재는 과거의 수직적 소통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껏 우리는 수직 형태의 소통에 길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군사독재의 영향은 위에서 아래로 명령체계의 언어문화를 조성해왔고, 일반인들까지 그런 수직 관계에 익숙해져 있다. 그야말로 일방통행의 소통구조인 것이다.

집안에서 아버지의 한 마디, 직장에서 상사의 한 마디, 군대에서 지휘관의 한마디, 학교에서 선생님의 한 마디가 그렇다. 이같은 수직적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소통의 당사자들은 서로 큰 분노감을 느끼고 돌이킬 수 없는 충돌이나 사건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한쪽은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았다는데 대한 분노, 그리고 한쪽은 자신의 의견이 항명이나 일탈로 매도당했다는 모욕감으로 분노하는 것이다.


너무 오랜 세월 길들여진 수직적 체계의 소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혹은 더 나아가 국가에 이르면 더 이상 미래를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렵다.

수평적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말에 실려 있는 권위의 힘을 빼버려야 한다. 지난날 40대의 젊은 나이에 영국의 수상에 취임해 10여년간 국가 수반으로 활동했던 토니 블레어가 다우닝가에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수상이라는 사실을 내세우지 않고, 시민들과의 토론을 즐기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했고 정치인의 새로운 표상을 보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의 마음을 잘 전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로 잘 표현할 줄 알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말을 할 줄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듣는 자세일 것이다. 먼저 상대의 말을 들어줄 수 있어야 상대도 나의 얘기를 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느 모임에나 참석해보면 그 모임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자신의 주장보다는 상대의 말에 경청하는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모임을 위해 어떤 대단한 아이디어나 모임의 경비를 혼자 부담하는 것도 아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런 사람을 중심으로 모임은 굴러 간다.

듣는 자세와 관련해 재미 있는 사례를 하나 소개해 본다. 남부 지방 어느 절에 가면 맞다 보살이라고 불리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다. 인근 동리와 그 사찰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이 보살을 잘 알고 있고, 이 보살을 봐야 몇 달이 편하게 흘러간다고 해서 이 보살을 만나러 일삼아 절에 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녀는 인기있는 보살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대단한 명성이나 학식을 쌓았거나 특별한 재주를 가진 것은 아니다. 절에서 그냥 허드렛일을 하는 아주머니일 뿐이다. 그런데도 절에 오는 사람들은 이 맞다 보살이 밭에서 풀을 뽑고 있으면 밭고랑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서, 공양간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또 공양간으로 쪼르르 모여들어 시시콜콜한 자신의 고민과 상담거리들을 한량없이 늘어 놓는다. 그러면 맞다 보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맞다! 니 말이 맞다!’라고 맞장구를 쳐주는 정도다. 세상에 자신의 얘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사람이 그만큼 드물다는 얘기다.

숙명여대에서는 몇 해 전부터 학생들의 토론 능력을 높이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른바 토론 콘테스트를 한다고 한다. 물론 다른 대학에도 이와 유사한 행사나 교육 프로그램은 많지만 유독 숙명여대를 손꼽는 것은 이 대학 토론 클럽의 이름 때문이다. 토론 대회에서 입상을 한 학생들이 가입하는 이 토론 클럽의 이름은 ()’이다. 토론을 잘 한다는 것이 단순히 말을 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 듣는 법에 있다는 이 대학의 깊은 교육철학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이 밖에도 듣기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얘기들은 많다. 삼국지연의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비도 그렇다. 특출난 재주도 없었던 그가 조조, 손권과의 경쟁에서 천하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남달리 훌륭했던 듣는 자세였고, 초패왕 항우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천하를 통일했던 유방 역시 큰 귀로 상징되는 탁월한 말 듣기의 고수 였다.

한자로 듣는다는 의미의 글자는 청()이다. 들을 청()이라는 한자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다시 하나씩 풀어쓸 수 있다.

耳王, 十目, 一心

우선, 이왕(耳王)은 듣는 일이 왕을 모시는 일보다 위에 있다는 의미도 되고 듣는데는 귀가 왕처럼 중요하다는 말도 된다.

둘째, 십목(十目)은 들을 때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적어도 열 번은 상대를 바라보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일심(一心)은 들을 때 한 마음으로 들으라는 뜻이다. 들리는 그대로 들어주라는 말도 되겠거니와 오해와 억측과 헐뜯음이 많은 세상에서 한마음으로 봐준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기의 말을 왕의 말처럼 들어주고, 혹시 행간에 다른 뜻은 없는지 살펴서 들어주고, 다른 계산 없이 한 마음으로 들어주는데 어찌 소통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정한 소통이란 바로 타인의 얘기를 들어 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자세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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